
미국 국적의 현대미술가 엔리코 엠브롤리(Enrico Embroli)는 한국 미술계에서는 아직 낯선 이름일 수 있지만, 서구 현대미술사에서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지닌 화가다.
그의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고 직접 컬렉션해 온 이홍남 폴 리(Paul Lee) 갤러리 대표와의 인터뷰는, 한 작가를 넘어 오늘날 한국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졌다.
이번 쇼벨과 이홍남의 인터뷰는 지난해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 코엑스에서 진행되었으며, 엠브롤리의 회화 세계와 더불어 한국 미술 시장의 구조적 한계, 그리고 ‘컬렉션’이라는 행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레오 카스텔리가 주목한 작가, 엔리코 엠브롤리
엔리코 엠브롤리는 전설적인 갤러리스트 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가 적극적으로 추천했던 작가로 알려져 있다.
카스텔리는 제스퍼 존스, 로이 리히텐슈타인, 로버트 라우션버그, 앤디 워홀, 바스키아, 제프 쿤스 등 20세기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발굴·후원한 인물이다.
이홍남 대표는 “레오 카스텔리를 모른다면 현대미술사를 논할 수 없다”며, “엠브롤리는 상업적 성공을 노리기보다 교육자이자 작가로서의 길을 선택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엠브롤리는 뉴욕에서 미술 교수로 활동하며 상업 갤러리의 제안을 여러 차례 거절한 것으로 전해진다.

재료를 아는 회화, 영혼의 색을 만드는 화가
엠브롤리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재료에 대한 완벽한 이해다.
단색에 가까운 화면이지만, 그 안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응축된 듯한 깊이와 물성이 공존한다.
이홍남 대표는 “한국 작가들은 종종 구상이나 구도부터 생각하지만, 엠브롤리는 재료의 성질과 물성을 완전히 꿰뚫은 뒤 작업에 들어간다”며, “그가 만들어내는 색은 단순한 혼합이 아니라 ‘영혼의 색’”이라고 표현했다.
오일 페인팅임에도 불구하고, 화면은 기름의 과잉을 배제한 절제된 질감을 보여준다.
이는 회화와 조각을 동시에 다뤄온 작가의 이력과도 맞닿아 있다.
“작품은 최소 20년은 지켜봐야 한다”
이 대표는 인터뷰 내내 ‘시간’을 강조했다. “작품은 최소한 20년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색도, 재질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합니다.
그 변화를 견디는 작품만이 살아남습니다.” 그는 단기적인 가격 상승이나 투자 관점에서 미술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서도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이 그림 사면 돈 벌어요? 이런 질문에는 작품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컬렉션은 관계이고, 신뢰이고, 시간입니다.” 엠브롤리의 작품을 10년 가까이 꾸준히 수집해 온 이유 역시 “가격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한국 미술계의 현실로 이어졌다.

이홍남 대표는 한국 작가들이 지나치게 트렌드를 빠르게 쫓아가는 경향을 지적하며, “너무 빨리 유행을 따라가면 금방 식는다”고 말했다.
대표 이홍남은 한국 미술이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 자기만의 개성, - 글로벌한 시야, - 장기적인 작업 태도를 꼽았다.
“K-POP이 세계로 나간 것처럼, 작가 자신이 글로벌한 감각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에서만 통하는 성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컬렉션은 인간적인 관계에서 시작된다
엠브롤리와의 관계에 대해 이홍남 대표는 “작품 이전에 사람을 보게 된다”고 말했다.
작가 엠브롤리의 작업실에서 며칠을 함께 지내며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과정 속에서 작품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작품은 그 사람의 삶과 태도가 응축된 결과입니다.”
엔리코 엠브롤리의 작품을 통해 이홍남 폴 리 갤러리 큐레이터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명확하다.
미술은 속도가 아니라 시간, 유행이 아니라 축적, 거래가 아니라 관계라는 것. 이번 인터뷰는 한 해외 작가의 소개를 넘어, 한국 미술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을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남긴다.
